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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는 ‘불의 나라’: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기원(중)

필자: 임명묵 작성일: 2020-12-23 카테고리: 국제 | 댓글 : 0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의 기원 

 1. 32년만에 ‘다시’ 전쟁 
 2. 부활하는 ‘불의 나라’
 3. 지리와 자원의 승리



 

[지난 이야기] 소련 체제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내리는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폭력 사태가 점차 통제 불능으로 치달아가고 있었다.
마침내 1991년 12월 25일, 소련이 완전히 무너지고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최종적으로 독립하면서, 두 민족, 아니 두 국가는 이제 언제
서로 잘 지냈냐는 듯이 전면전에 돌입한다.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상 위치와 주변 국가들

갈등의 뿌리,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지정학적 위치(퍼블릭 도메인)


아르메니아의 승리와 종전  

소련이 해체되고 며칠 뒤, 1991년이 저물고 1992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쟁이 본격적인 전면전에 접어들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르메니아군이 신속히 행동을 개시하면서 파죽지세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밀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1992년 2월, 아르메니아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로
향하는 요충지인 호잘리를 점령했고, 5월에는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아르메니아 사이에 위치한 슈샤와 라친을 점령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체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1993년에도 아르메니아의 승전고는 계속 울려퍼졌다.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는 물론이고 그 지역을 넓게 둘러싼 아제르바이잔의 영역까지
아르메니아군의 점령지로 얻을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의 반격 시도가 일부 성공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인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양국의
전쟁은 해를 한 번 더 넘겨 1994년까지 이어지다가, 그 해 러시아, 미국, 프랑스 등의 국가가 개입하여 맺은 휴전 협약인 비슈케크 협약으로
종결된다.

비슈케크 협약으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전투를 중지하고 전쟁은 마무리 되었으나, 결과는 쓰라렸다. 가장 먼저, 전쟁은 소련 치하에서
불안하게나마 유지되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리인(=아제르바이잔인)의 공존을 완전히 끝내버렸다. 수백년을 이어오던 아르메니아의 아제리인과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공동체는 모두 생활 터전을 잃고 상대국으로 추방됐다. 게다가 1988년부터 1994년까지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독립
선언과 전쟁 등의 혼란이 이어지면서 발생한 민간인 학살은 양국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다. 양측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자행된
숨가이트(Sumqayıt) 학살(1988)과 호잘리를 점령한 아르메니아군이 저지른 호잘리(Khojaly) 학살(1992)을 계속해서 언급하며
상대국을 비난했다.

1992년 2월 25일에서 26일 사이에 벌어진 호잘리 학살과 관련한 사진. 아제르바이잔 측 주장에 의하면, “106명의 여성과 83명의
아이들을 포함한 613명의 사망자”를 초래한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분쟁 기간 중 최대 규모의 학살이다. (출처: 호잘리대학살)

물론 고통은 패자에게 가장 쓰라린 법이었다. 아르메니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는 물론이고 새롭게 획득한 아제르바이잔 점령지를 ‘아르차흐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신생국으로 독립시켰다. 그러나 아르차흐가 아르메니아의 위성국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를 제외하고도 자국민이 역사적으로 거주하던 땅까지 빼앗긴 채로 독립을 해야했다.

반면 승자인 아르메니아는, 카르스 조약 이래로 7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쌓인 민족의 한을 풀 수 있었다. 아르메니아인은 그동안 소련이라는 한
나라였지만, 어쨌든 떨어져 있었던 나고르노-카라바흐와 마침내 하나의 국가를 이루는 숙원 사업을 달성했다.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이 전쟁을
‘아르차흐 해방 전쟁’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아르메니아 승전 요인 

그렇다면 아르메니아는 어떻게 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을까?

먼저 양국 전투력의 차이가 있었다. 양국 군인들이 모두 소련의 징병제 하에서 붉은 군대에 입대하여 훈련 받긴 했지만, 공병대 위주였던
아제르바이잔군보다는 전투병 위주인 아르메니아군이 더 실제 야전에 대비되어 있었다.

외교도 아르메니아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소련이 해체되고 10개가 넘는 후계 국가가 생기자, 신생 유라시아 국가들을 둘러싼 강대국과 지역 국가들의
치열한 외교적 각축전이 발생했는데, 전쟁까지 발발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먼저 세계 각지에 퍼져 있던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διασπορa: 세계에 흩어졌지만, 민족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한 사람들, 특히 ‘유대인’을 지칭했던 표현)는 로비를 통해 서방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지원하게끔 압력을 넣었다. 이렇게 움직인 대표적인 나라는 미국이었으며, 프랑스도 아르메니아에 동정적이었다. 과거 ‘맏형’인
러시아도 심정적으로 아르메니아에 더 가까웠다.

거기에,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이슬람 국가, 그것도 시아파 이슬람을 믿는 이란마저 아르메니아 편에 섰다. 이는 신생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이 이란
북서부에 위치한 남아제르바이잔의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할 것이라는 테헤란 정부의 우려가 반영된 정책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이 의지할 강국은 형제
국가를 자처하는 터키 뿐이었으나, 터키의 도움만으로 사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전투에서 패배가 이어지자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패전 책임을 두고 내부에서 분열한 것도 문제였다. 1993년에는 실제 수라트
후세이노프의 쿠데타까지 이어지면서 아제르바이잔의 정정 불안은 극에 달했다. 이렇게 전쟁은 아르메니아의 완전한 승리와 아제르바이잔의 뼈아픈 패배로
끝났다.

아르메니아의 국장 vs. 아제르바이잔의 국장 (각각 1994년, 1992년 제정)


소련 해체가 초래한 ‘에너지 매장지’ 개방 

그러나 얄궂게도, 전쟁은 독립 후 이들이 걸어가야 할 이야기의 시작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종전 직후 곧바로 반전되기 시작한다.

소련의 해체는 수많은 의미를 갖지만, 지정학적으로 가장 중대한 의미는 중앙유라시아의 거대한 에너지 매장지가 세계에 개방되었다는 데 있었다.
캅카스에서 중앙아시아를 지나 시베리아와 북극해까지 포괄하는 소련의 광대한 에너지 자원과 광물 자원은 그동안 오직 소련이 이끄는 공산주의 진영을
위해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냉전기 소련은 미국처럼 시장을 열어주어 동맹국을 끌어들일 수는 없었어도, 그래도 넘치는 석유와 천연가스로 동맹국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잡아둘 수는 있었다. 이는 다른 나라는 소련이 확보한 중앙유라시아의 광대한 에너지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미국과 버금가는 최강의 산업 국가이자,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세계 최초의 산유국 중 하나였던 소련은 이미
엄청나게 많은 석유를 채굴해서 사용한 상태였지만, 소련의 낙후한 에너지 기술로는 추가적인 매장지를 개발하여 생산량을 늘릴 수가 없었다(물론 소련
후기와 말기에도 계속해서 에너지 매장지 탐사와 추가적 개발은 이루어졌지만, 전체적으로 보자면 역부족이었다).

소련 붕괴는 소련에는 비극이었지만, 세계 에너지 시장으로서는 이 두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주는 황금 같은 계기였다. 모스크바의 정치적 통제가
사라지면서, 탈소비에트 국가들은 각자 자신의 영토에 확보한 에너지를 채굴하여 세계 시장에 판매해 국부를 확보하고자 했다. 과거 소련이 탐사만
해놓고 기술과 투자 부족으로 개발하지 않고 있던 매장지에 첨단기술로 무장한 서구의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이 들어가 새롭게 측량과 탐사를 시작했다.

이 지역이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기회의 땅이었음은 금세 드러났다. 1990년대에 서구 에너지 기업들은 앞다투어 유라시아로 몰려가 개발 계약을
맺고 채굴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리고 여기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두 나라가 있었으니 바로 카스피해의 샤 데니즈 가스전을 갖고 있던
아제르바이잔과 카자흐 초원의 텡기즈 유전과 카스피해의 카샤간 유전을 갖고 있던 카자흐스탄이었다.




터키, 캅카스-터키-유럽 ‘파이프라인’ 개발 제안(1992)  

물론 이런 프로젝트들이 성과를 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렸고, 아제르바이잔은 그때까지 다른 탈소비에트 국가들처럼 체제 이행의 고통스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특히 아제르바이잔 에너지 산업은 소련 말기에 이미 개발된 유전의 매장량 고갈과 소련 붕괴로 인한 정치, 경제적 혼란으로 엄청난 생산량
감소를 겪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세기의 계약’들은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시작을 알린 국가는 터키였다.최대 가상 적국이던 소련 붕괴로 신생 튀르크계
민족 국가만 5개가 생기는 것을 보며 즐거운 비명을 지른 터키는 튀르크 민족의 지도국으로서 스스로 자신의 위치를 재정립하려는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그 중에는 당연히 에너지도 있었다.

탈소비에트 유라시아 국가들의 가장 큰 고민 중 하나는, 그들이 국부의 원천이 되어야 할 에너지 수출을 모두 러시아 인프라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애당초 소련이 모든 인프라 계획을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설계했기에 이는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 국가가 자국의 천연가스와
석유를 기껏 유럽으로 수출하려고 해도, 가장 큰 이득을 얻는 건 파이프라인을 갖고 있는 러시아가 되는 모양새였다.

그러니 터키가 러시아의 이런 파이프라인 독점에 대응하여 해줄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유럽으로 향하는 우회로를 터키가 제공해주면 되는 것이다.
1992년, 한창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부터 노장 총리 쉴레이만 데미렐(1924-2015)은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해 캅카스를
지나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파이프라인을 공동으로 개발하자는 제안을 탈소비에트 국가들에 던졌다.

쉴레이만 데미렐(Suleyman Demirel, 1998, 퍼블릭 도메인). 1992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중에 당시 터키 총리였던 데미렐은
캅카스-터키-유럽을 지나는 파이프라인 공동 개발을 탈소비에트 국가들에 제안한다. 그리고 데미렐은 후에 터키 제9대 대통령(1993~2000)을
역임한다.

이 새로운 파이프라인의 핵심적인 결절지(두 지역 이상의 연결 지역)는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이 될 것이었다. 역내의 에너지 생산 강국인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생산된 석유와 천연가스는 유조선과 LNG 선박에 실려 아제르바이잔의 카스피 해안으로 향할 것이고, 거기서 아제르바이잔 현지에서
생산된 에너지와 함께 서쪽으로 향할 것이었다. 이 파이프라인이 터키를 거쳐 지중해로 빠진다면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인프라 독점을 뚫고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셈이었다.

사실 이는 중간에서 재미를 보던 러시아를 제외하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터키는 역내 영향권을 확보하고 에너지 안보도 챙길 수
있었고,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은 러시아에 빼앗기던 유통비용을 확보할 수 있었으며, 에너지의 주요 수요자인 유럽은 러시아를
거치지 않는 직거래를 통해 더 싼 값에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BTC’ 파이프라인

1993년, 아제르바이잔의 정국 혼란이 가시고, 과거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 시절 제1서기를 맡았던 KGB 출신의 헤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새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는 빠르게 탄력을 받았다.

소련비밀경찰 KGB 출신의 헤이다르 알리예프은 아제르바이잔의 제3대 대통령(1993-2003)을 역임했다. 그리고 알리예프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는 탄력을 받는다.

그러나 아제르바이잔이 진행하고 있던 프로젝트는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같은 탈소비에트 독립국인 조지아와도 논의를 시작하여
바쿠에서 흑해에 면한 조지아의 숩사로 통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1996년에는 바쿠 남쪽 약 45km 거리에 카스피 연안국의
에너지가 집결하는 상가차이 터미널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과 아제르바이잔과 카스피해의 석유, 천연가스 매장지를 탐사하고
개발하는 상호 계약에도 서명했다.

이런 노력들에 힘입어 1998년에는 생산량이 다시 반등하기 시작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에너지 산업과 경제 전반이 회복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그
해 아시아 금융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엄이 터지면서, 유가는 바닥을 찍고 아제르바이잔은 다시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아제르바이잔 입장에서 1998년의 위기는 해가 뜨기 직전의 가장 깊은 어둠이라고 할만 했다. 2000년대가 시작되며,
1990년대에 아제르바이잔이 개시해놓은 프로젝트들이 하나씩 진척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상가차이 터미널과 바쿠-숩사 파이프라인은
일찌감치 가동을 시작했고, 1998년에는 바쿠에서 출발해 터키로 향하는 파이프라인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파이프라인 경로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B),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T), 지중해에 면한 터키의 도시인 제이한(C)을 잇는 모습이 될 것이었고,
파이프라인의 이름도 이 주요 세 도시의 앞글자를 따서 BTC 파이프라인으로 하기로 결정되었다. BTC 파이프라인은 2002년에 착공되었다.
2004년에는, 바쿠에서 트빌리시를 거쳐 터키 동부의 에르주룸까지 이어지는 남캅카스 가스 파이프라인도 착공되었다.

남은 것은 이 파이프라인들로 실어나를 석유와 천연가스였는데, 이미 파이프라인 건설과 동시에 샤 데니즈를 비롯한 대형 유전들이 카스피해에서
개발되어 생산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이 얽힌 온갖 사업들이 번개 같은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바쿠(아제르바이잔)-트빌리시(조지아)-제이한(터키)을 잇는 ‘BTC 파이프라인’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SA 3.0)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10년 가까이 착실히 도약을 준비하고 있던 아제르바이잔 에너지 산업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단순한 도약이 아니었다. 그들은 2004년과
2006년에 결정적인 분기점을 맞이하면서 아예 날아올랐던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인이 중대한 역할을 했다.

첫째, 2004년을 기점으로 세계 유가가 고공 행진을 이어가면서 산유국들에 막대한 부를 선사했다. 중국을 필두로 한 아태지역이 폭발적인 경제
성장을 달성하면서 이 지역의 엄청난 에너지, 원자재 수요가 유가를 양등시켰다. 게다가 9.11 테러를 당한 미국이 아프간 전쟁,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하면서, 핵심 산유국이 몰린 중동 지역이 불안정해진 것도 중요했다. 거기에 대형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멕시코만 일대의 석유산업단지를 강타하면서, 유가 상승은 도저히 걷잡을 수 없는 기세를 탔다.

아제르바이잔 에너지 산업에 있어서 두 번째 호재는 세계 최대의 석유와 천연가스 공급원 중 하나인 러시아가 에너지를 다시 정치적 무기로 쓰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발단은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오렌지 혁명이었다. 오렌지 혁명은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당선되자, 개혁,
친서방 성향의 빅토르 유셴코를 지지하는 시위대의 압박으로 재투표가 진행되어 마침내 유셴코가 집권한 사건을 일컫는 용어로, 장미 혁명(2003,
조지아), 튤립 혁명(2005, 키르기스스탄)과 함께 ‘구소련권 국가에서 일어난 일련의 민주 혁명’을 일컫는 색깔 혁명 중 하나다.

2004년 우크라이나의 오렌지 혁명 (출처: Marion Duimel, CC BY SA 3.0)


푸틴의 역습, ‘러-우 가스 분쟁'(2006)  

그러나 소비에트 권역에서 러시아의 세력을 회복하고자 했던 러시아의 푸틴은 이런 움직임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러시아 주변국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운동을 미국과 나토가 배후에서 러시아를 위협하고자 조종하는 정치적 음모라고 해석했다. 푸틴은 자꾸 러시아에 반항적으로 나오며 유럽연합과
나토, 나아가 미국에 줄을 대려는 우크라이나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고, 우크라이나가 얼마나 러시아와 불가분의 관계인지 보여주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먼저 그는 우크라이나에 과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베풀어주던 배려인 가스 가격 할인을 중단할테니 우크라이나도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정상적인
가격으로 가스를 구매할 것을 요구했다. 가난한 우크라이나로서는 그런 갑작스런 에너지 비용 상승은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고, 가격 협상은 금세
지지부진해졌다. 여기서 푸틴은 2006년 새해 벽두에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특단의 조치를 취하면서 공세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천연가스를 보안 문제로 끊어버린 것이다.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푸틴 대통령. 푸틴은 2006년 새해 벽두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천연가스 공급을 전격적으로 삭감하는 유래 없는 초치를
취했다.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CC BY)

매서운 겨울 추위를 천연가스 난방도 없이 보내야 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충격을 받은 것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를 거쳐 서유럽으로 공급되는 천연가스도 차단됐다. 서유럽 사람들은 북해와 알제리 등 대체 경로를 통해 가스를 공급받을 수 있었기에
우크라이나만큼의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와 마주앉아 협상해야 하는 베를린과 파리, 런던과 워싱턴의 전략가들은 어쩌면
우크라이나인들보다 더 깜짝 놀랐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들은 러시아가 자국이 건설해놓은 에너지 공급망을 언제든지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무기화할 수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향해서 에너지 공격을 할 수 있다면, 폴란드를 비롯한
반러적 동유럽 국가, 나아가서 서유럽까지도 공격하지 못할 것은 또 무엇인가?

따라서 가스의 수요자들인 서유럽 국가, 나아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고자 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러시아 가스 이외의 대안적 공급로를
확보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한 과제가 된 셈이다. 당장 압도적 공급량과 가격 경쟁력을 갖춘 러시아 가스를 모두 대체할 수야 없겠지만, 유사시
러시아가 에너지를 빌미로 서유럽 국가들을 위협할 때 러시아에 맞서고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지지대마저 없으면 러시아가 가스를 빌미로 무엇을
요구하고 나올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아제르바이잔, 부활하는 ‘불의 나라’

아제르바이잔에서 세 개의 대형 프로젝트가 완공되어 가동에 들어간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2006년 5월, BTC 파이프라인이 완공되어
바쿠에서 지중해까지 석유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고, 12월에는 터키의 에르주룸으로 천연가스가 향하고 있었으며, 역시 같은 해 샤 데니즈 가스전도
생산에 돌입했다.

이제 서방 진영에 있어서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와 중앙아시아 에너지가 유럽으로 향하는 중간 집결지이자 중요 에너지 생산국으로서 전략적으로
독보적인 가치를 지닌 국가가 되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가긴 했지만, 투르크메니스탄과 아제르바이잔의 가스를 터키를 거쳐 유럽으로 이송하려는
파이프라인 신설 프로젝트인 ‘나부코 프로젝트’가 논의된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였다.

아제르바이잔의 국력을 상징하는 ‘유전 도시’ 바쿠 (출처: 퍼블릭 도메인, Faik Nagiyev from Pixabay)

유가가 여전히 하늘을 뚫을 기세로 상승하는 와중에 이런 대형 프로젝트들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자 아제르바이잔은 순식간에 돈방석에 앉게 되었다.
수출로가 다변화되고 그에 맞추어 생산량도 늘었지만, 유가는 계속해서 올라갔기에 이는 당연한 결과였다. 마치 바쿠가 100여년 전 최초의 석유붐을
겪고 있을 때를 연상케 하는 뜨거운 열기가 바쿠 건설 시장을 휩쓸었다.

한편 이런 호경기는 2003년에 헤이다르 알리예프 대통령이 죽고 그의 아들 일함 알리예프가 대통령직을 세습하는 것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아제르바이잔은 알리예프 가문을 필두로 한 정치 엘리트들이 에너지 산업을 쥔 채로 에너지 수출의 혜택을 국민에게 나눠주면서 불만을 잠재우는 지대
추구 국가(rent seeking state)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세습을 가로막을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국내에서 일함 알리예프는
21세기 경제발전과 민족 부흥을 이끈 지도자로 행세할 수 있었다. 해외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이 그 절묘한 위치로 에너지 지정학에서 몸값이 자꾸
올라가니 그를 작심하고 비판할 수가 없게 되었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된 일함 알리예프(1961년~ 2020 년 현재, 임기: 2003년~ 2020 현재, 출처: 위미미디어 공용, CC BY
4.0)


아제르바이잔의 ‘전략적 파트너’로 부상한 이스라엘 

게다가, BTC 파이프라인의 완공은 아제르바이잔에 예상 외의 전략적 파트너를 안겨주기도 했다. 바로 이스라엘이었다. 적대적인 아랍 국가로
둘러싸인 이스라엘로서는, 안정적인 에너지 공급선을 확보하는 것이 언제나 급선무였는데, BTC 파이프라인을 통해 실려와 지척에 있는 터키의
제이한에서 출발하는 유조선은 이스라엘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에너지 공급원이었다.

2006년 BTC 파이프라인이 가동을 시작한 이래로 바쿠의 석유는 제이한을 지나 이스라엘의 텔아비브로 바쁘게 움직였고, 어느새 아제르바이잔은
이스라엘 석유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하는 최대의 에너지 협력국으로 변모해 있었다. 이런 아제르바이잔과 관계를 발전시키기를 원한 이스라엘은,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는 캅카스 산악 유대인들을 매개로 아제르바이잔과 역사, 문화 교류를 더욱 밀도 있게 추진했고, 이스라엘 기업의 아제르바이잔
투자를 독려했다.

거기에 양국은 에너지뿐 아니라 지정학적인 문제로도 협력할 이유가 있었다. 마침 이스라엘의 최대 주적인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이래로 껄끄러운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자국의 아제리인 분리주의 운동을 막겠다는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에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고 대신 아르메니아를 은연 중에 지지한 이란을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이스라엘이 파고든 것은 이 지점이었고, 양국은 이를 빌미로 군사적 협력까지 강화했다. 아제르바이잔도 우수한 이스라엘제 무기를 들여오면서 군
현대화를 추진했는데, 그 목표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의 복수임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이스라엘과 아제르바이잔은 각국의 이해관계에 맞는 전략적 파트너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란과 대립했다.


아르메니아 승리와 독립… 그리고 ‘고립’ 

패자인 아제르바이잔이 이렇게 발전하는 와중에, 승자인 아르메니아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역설적이게도, 전쟁의 승자 아르메니아는 상황이
호전되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이는 전쟁이 아르메니아가 태생적으로 갖고 있던 불리한 지리적 조건을 더욱 나쁘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거대한 내해 카스피해를 끼고 있기에, 비록 중앙아시아 국가들로 한정되지만 수로를 이용할 수 있고, 무엇보다 카스피해의 엄청난
에너지 자원에 접근할 수 있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바다라고는 눈에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철저한 산악 내륙국이었다. 과거 소련 시절이라면 이는 전혀 문제가 안 되었다.
아르메니아인들도 흑해나 카스피해, 아니면 심지어 태평양의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독립을 이루고 나니
아르메니아는 이란, 터키,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 둘러싸인 내륙국이 되고 말았다.

아르메니아의 지정학적 위치. 아르메니아는 전쟁에서 승리해 독립했지만, 지리적으로는 고립됐다. (출처: 구글지도)

독립으로 인한 지리적 고립의 문제는 아르메니아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더 큰 문제가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의 위성국인 아르차흐를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비슈케크 협정은 그저 휴전이지 종전이 아니었고, 양국의 외교관계를 비롯한 모든 관계는 그 이후로 단절되었다. 자연히
아르메니아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은 닫혔다.

그런데 터키가 여기에 가세하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아제르바이잔의 형제 국가를 자임하는 터키는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과의 문제를 풀기
전까지는 아르메니아와 역시 수교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아르메니아로서는 서쪽으로 향하는 중요한 통로 또한 상실한 셈이다. 게다가,
아르메니아에서 남쪽 이란으로 향하는 철도가 하필이면 아제르바이잔령인 나히체반을 지나면서 아르메니아는 이란과의 중요한 물류 통로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과거 소련에서 터키와 이란으로 향하는 국제 철도 교통의 요충지였던 귬리 철도역은 아르메니아의 고립을 나타내주는 생생한 증거다. 철도역은
이제 황량해서 사람을 찾기가 힘들고, 오직 조지아의 트빌리시를 거쳐 흑해의 바투미로 향하는 철도 한 가닥만이 과거의 흔적만 간직하고 있다.

과거에는 터키와 이란으로 향하는 국제 철도의 요충지였지만, 지금은 과거의 영광을 뒤로 하고 초라하게 쇠락한 굼리역 (사진: 임명묵)


‘지리적 고립’에서 ‘정치적 고립’으로  

사실 아제르바이잔은 전쟁 중에도 아르메니아의 예정된 고립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터키와 신설 파이프라인을 논의할 때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때문에 아르메니아를 거치는 경로는 고려할 수 없겠다고 이야기했다. 요컨대 아르메니아가 아르차흐(나고르노-카라바흐)를
계속해서 점거한다면, 아제르바이잔은 전쟁에서는 졌을지 몰라도 자신의 지리적 입지와 터키와의 외교적 관계를 총동원해 아르메니아를 최대한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에너지 산업의 중심지로 개발된 아제르바이잔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부는 바로 인접한 아르메니아로 전혀 이전되지
않았고, 대신 경로를 제공해준 조지아만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의 고립은 경제적 고립을 넘어 정치적 고립으로까지 이어졌다. 전쟁 초기 아르메니아가 누렸던 외교적 이득은 아제르바이잔이 유라시아 에너지
지정학의 핵심 국가로 부상하면서 금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특히 미국의 이탈이 결정적이었다. 미국의 아르메니아 디아스포라는 여전히 큰
영향력을 갖는 디아스포라 중 하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와 유럽 문제 전반이 들어가 있는 이 체스판을 뒤흔들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괜히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줬다가 아제르바이잔이 서방 진영에서 아예 멀어져버리면 러시아의 에너지 독점만 더 강화하는 셈이었다. 이란은 여전히
아르메니아에 우호적이었지만, 미국이 봉쇄하고 있는 국가인 이란은 아르메니아를 도와주기에는 제 코가 석자인 국가였다. 터키는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아르메니아의 적성국 1순위였다.

남은 국가는 인접한 조지아와 러시아였는데, 조지아는 심정적으로 아르메니아에 동정적일지는 몰라도 아제르바이잔에서 오는 파이프라인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보는 국가였다. 러시아도 독자적인 에너지 수출국으로 부상하려는 아제르바이잔을 불편하게 쳐다보았지만, 그럴수록 아제르바이잔을 러시아 중심의
공급망에 계속 잔류할 수 있도록 더욱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마 아르메니아에 다행인 것은, 구소련 권역의 정치, 군사적 영향력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러시아가 아르메니아 내의 러시아군 기지를 유지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르메니아 입장에서 러시아군 기지의 존재는 혹시 모를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의 군사적 행동을 막아줄 보험으로 기대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일머니로 갑자기 부자가 된 아제르바이잔이 패전의 치욕을 갚고자
적극적으로 군비에 투자하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과거의 지배자인 러시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처지는 결코 유쾌할 수 없었다.

아르메니아 박물관에 전시된 아르차흐 해방 전쟁 사진 자료들. 아르메니아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점점 더 고립됐다. (사진:
임명묵)


커지는 갈등… 마르가랸 도끼 피살 사건(2004)

패자와 승자의 운명이 역전되는 동안 나고르노-카라바흐를 둘러싼 갈등은 계속 이어졌다.

2008년, 2010년, 2011년에도 양국 병사들은 국경 지대에서 충돌했고. 이런 산발적 교전은 언제든 더 큰 무력 충돌로 확전될 소지가 있는
것이었다. 2012년에는, 2004년 헝가리에서 아르메니아 장교인 구르겐 마르가랸(Gurgen Margaryan: 1978-2004)을 도끼로
살해하여 수감되어 있던 아제르바이잔 장교인 라밀 사파로프를 본국으로 송환하는 문제로 양국 간 갈등이 다시 불거지기도 했다. 물론 국제사회의 훨씬
더 크고 엄중한 사건들이 널렸기에, 사람들 대부분은 캅카스에 위치한 양국의 ‘늘상 있는 충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외신 뉴스
단신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아르메니아 장교 구르겐 마르가랸(Gurgen Margaryan: 1978-2004)은 아제르바이잔 장교 라밀 사파로프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사진 우측은 예 레반에 세워진 기념비. (출처: 위키미디어 공유, CC BY-SA 4.0)

2010년대를 거치며 상황은 다시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국정 안정성이 크든 작든 간에 저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가지 요인이 이에 중요했다. 먼저 2014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크림 반도를 합병하고 동부 돈바스에서 전쟁을 벌이면서 러시아의 대외적 입지가
크게 흔들렸다. 푸틴 정권 들어 발전하던 러시아 경제는 침체되었고, 정치적, 사회문화적 자유를 비롯한 각종 권리가 후퇴했다. 이로 인해 러시아가
기존에 국제 사회에 갖던 영향력, 특히 탈소비에트 권역에 갖고 있던 영향력 또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소련의 기억이 희미한 젊은 세대는 더는 러시아를 소프트 파워 강국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중심이 새롭게 부상하여
유라시아 국가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러시아의 공격적 행보, 경제적 침체, 소프트 파워의 약화 등은 소련의 기억을 공유하고 러시아에 친숙한 기성
세대가 지지하는 정치 세력, 주로 친러 성향의 보수적 집권당들에는 큰 부담이 되었다. 러시아 소프트 파워의 쇠퇴는 서구 지향적이고, 더
자유주의적인 젊은 세대의 정치적 저항이 더욱 거세지는 결과로 이어질 공산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 벨벳 혁명(2018) 하지만… 

당장 우크라이나부터가 그런 갈등으로 러시아에서 이탈하고 친서구적인 개혁파가 집권한 국가이기도 했다. 이런 위기는 2008년부터 2018년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세르지 사르키샨이 이끄는 아르메니아에서도 불거졌다. 사르키샨은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한 뒤 총리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자신은
총리직을 맡을 시도도 하지 않고 퇴임하겠다 했는데, 2018년에 그가 총리직을 맡으며 권력 연장을 시도하자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한 것이었다.
이는 2018년 아르메니아 벨벳 혁명이라고 불리는 시위를 통한 정권 교체로 귀결되었다.

아르메니아 ‘벨벳 혁명'(2018). 4월 22일 예 레반 공화국 광장에 모인 시민들. (출처: 퍼블릭 도메인)

사르키샨은 사임했으며, 그 대신 시민계약당의 니콜 파시냔이 총리직에 올랐다. 그러나 파시냔도 아르메니아의 고질적인 지정학적 고립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으며, 그렇기에 현실적으로 러시아 의존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것은 여전했다. 파시냔은 유럽연합과 미국이 제시하는 몇몇 자유주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그런 개혁 조치를 강하게 추진할 경우 이미 색깔 혁명이라면은 지긋지긋하게 느끼고 있을 러시아를 자극할 우려가 있었다.


셰일 혁명과 아제르바이잔의 위기 

아르메니아에서 겪는 정치적 불안을 아제르바이잔이라고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2014년에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말고 또 다른 중대한
일이 벌어졌는데, 바로 세계적인 유가 폭락이었다. 고유가에 대응하여 개발된 각지의 유전들이 영업을 시작하면서 공급이 늘어나고, 미국이
셰일가스(셰일층에서 만들어지는 천연가스)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면서 에너지 산업의 판도는 완전히 바뀌고 있었다(이른바 ‘셰일혁명’). 거기에
원자재 수요를 이끌던 중국 경제의 폭발적 성장도 점차 중고속 성장으로 둔화되면서 수요 요인도 타격을 받았다.

이런 와중에 사우디아라비아가 미국의 셰일 업체들을 말려죽이겠다며 대대적 증산을 감행하니 유가가 버틸래야 버틸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14년에
시작된 저유가 뉴노멀은 2004년부터 10년 간 이어지던 고유가를 즐겨 오던 아제르바이잔이 경제적 치명타를 입는 것을 의미했다.

1인당 GDP의 변화는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2014년만 해도 거의 8,000 달러까지 근접하여 3,800 달러에 머물던 아르메니아를 두
배 가까이 상회하던 아제르바이잔의 1인당 GDP는, 2016년 3,900 달러로 반토막났으며, 그나마 최근 소폭의 회복을 이루어 4,800
달러가량을 기록했다. 이 수치는 4,700 달러인 조지아나 4,500 달러인 아르메니아의 1인당 GDP와 거의 차이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의 경제를 지탱하던 유전은 ‘셰일 혁명’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에너지 수출을 통한 이득을 통제, 분배하면서 2대에 걸친 정치 권력을 유지하던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으로서 저유가가 불러온 타격은 그야말로 뼈아픈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저유가 국면이 장기화되면서 일함 알리예프에 대한 지지 이탈과 야당의 반발, 반정부 시위의 확산과 같은 정치 위기 등이
계속해서 벌어지는 가운데 일함 알리예프는 2018년 4선 연임에 성공했고, 2020년에는 야당 반발을 무릅쓰고 2월에 조기 총선을 감행하여
의회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2020년 9월에, 전쟁은 그런 상황에서 다시 발발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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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명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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